빌보 1:19~26 “내가 사는 이유” (바울사도가 살아야 하는 이유??)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 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 일진대 무엇을 택하여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삶의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그 사람은 목적지을 알고 달려 가는 사람이 때문이다
그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그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울사도는, 자유의 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사형수라는 죄목으로 감옥안에 있을 때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담대하게 나아가는 모습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은혜안에 붙잡힘 봐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삶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자로 변화 된 것은
다메섹 길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사행9:3.4)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 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르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를 자신의 의지와 노략으로 속죄함 받기위해 살아가는 사울이
사울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위해 죽거나
사울 자신을 위해 죽고자 한다면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현실에서
누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 주는 이도 없는 세상에서
오직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께서 사울 앞에 나타나 사울을 부르시는 예수님………
그 때에 사울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아 알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바울사도의 고백이 아닌가?
이제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바울사도의 삶에서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오직 주님을 향한 마음은 (믿음은) 변함이 없다는 고백이 아닌가?
환경에 어떤 변화가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향한 자신의 믿음이 변함없음을 고백하는 말씀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활의 주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렀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나는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놓인다 할 찌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변함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삶이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성령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신앙에 양심의 소리가 들릴 때)
주님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안에 있음을 믿고 주저함 없이
아멘 하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또한 나는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가?
타인들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나에 삶이 언행일치가 되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자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 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왜 죽어야 살수 있는지 다시한번 깊이 묵상하게 되는 순간이다
나는, 우리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다
내 노력이나 내 의지로 얻은 구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이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써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갈 때
성도들의 구원은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정리해 보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영혼이 깨어 기도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의 사람을 살아가는 성도가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롬5:1~4 “그르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육신의 장막에서 살아가는 나에 영혼이
육 적인 고통이나 고난을 통하여 주어지는 시련을
성도에게 주어지는 연단이라 생각하며
즐겁게 받아 들릴 수 있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는가?
그 만큼에 성숙한 믿음이 나에게 있다면
나의 삶은 언행일치가 되는 성도로 살아간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믿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의 말씀을 나는 사랑한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나는 이 말씀을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며
주님을 만나던 그 첫 사랑을 생각한다
나는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와 같은 고백이 있었고
‘호세아’ 와 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육신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나에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로 충만하지 않았는가?
내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 보다
내 생각 내 기준을 내려 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를수록 육신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삶의 현상과 현실 앞에서
육신의 욕망을 따라 가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어제부터 인가?
나의 기도는 회개 기도의 연속 선상에 놓이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삶이, 나의 생각이, 바울사도와 같은 믿음으로
분명하게 삶을 목적을 깨닫아 알고 살아간다면
“호세아” 와 같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호세아’ 에게 ‘고멜’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용서하라 하시고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것을 묵상할 때
‘고멜’ 보다 더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며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내가 깨닫아 알아간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의 목적은 분명하게 깨닫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사랑 그 은혜를 깨닫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충만할 때
바울사도의 믿음을 본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우리가 예수를 닮기를 원하는데…
내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자기부인하기를 싫어하는 삶을 살면서 바라는 것이 많은 성도의 삶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아버지~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의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아버지…….
부족한 종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아 알 수 있는 믿음의 복을 허락하셔서
말씀을 보고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아 알고
감사함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이 세상에서의 삶을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아 알게 하소서
부족한 종이 고난속에서 주님을 만났던 그 시간
주님 앞에 고백했던 첫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종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 아 멘 –
2025/7/10 - 김 성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