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추천도서, 『팀 켈러, 죄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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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시대를 읽고, 시대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 시대의 멘토, 팀 켈러. 그의 사후 발간되는 첫 신작!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 시대, 

팀 켈러와 함께 추적하는 불편하지만 위대한 진실

세상 모든 혼돈의 뿌리인 ‘죄’의 다면적 얼굴을 파헤치다

 

세상은 눈부시게 진보하는데 어째서 사방에 악과 고통이 멈추지 않는가. 우리는 왜 선을 원하면서도 자신을 파괴하는 길을 선택하는가. 대체 세상은 왜 이 모양이며, 인간이라는 존재는 왜 이러는 것일까? 팀 켈러는 특유의 예리한 시선으로 날마다 보도되는 절망적이고 참혹한 인간의 악과 고통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는 이 현상을 단순히 생물학, 심리학, 사회 구조적 문제로만 환원하려는 현대 세속 지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이 정면으로 마주하기 불편해하는 인기 없는 진실, ‘죄’를 정직하게 ‘죄’라고 명명하며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삶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현실적인 답을 준다고 강조하며, 추악한 죄인들을 건져 내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우리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 낸다.

 

현대인의 폐부를 꿰뚫는 순도 높고 단단한 

팀 켈러 설교의 원형!

오직 복음으로 우리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이 책은 표류하는 영혼을 위한 닻이자, 복음이 내놓는 명징한 해답이다. 단순히 죄에 관한 신학적 정의를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실제적인 절망과 부조리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1990년대, 더없이 세속적이고 냉소적인 뉴요커들의 교묘한 자기기만을 뒤흔든 팀 켈러의 논리적 서사를 고스란히 담았다. 당시 그가 전했던 시리즈 설교 “죄의 여러 얼굴”을 토대로 한 이 신작은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 그 밑바닥에서 붙들어야 할 단 하나의 소망인 그리스도 예수께로 우리를 이끈다. 죄가 단지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잠식하는 복잡한 실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영혼이 갈망하는 근본적 치유의 길이 열린다. 내가 얼마나 위중한 상태인지를 직시할 때에야 나를 위해 예수가 해 주신 일의 위대함을 비로소 헤아릴 수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팀 켈러가 남긴 영적 유산, 그 첫 번째 프로젝트

 

머리말. 죄 이야기에 눈감으면 인간에게는 출구가 없다

 

Part 1. 

평범한 인간의 마음 한복판에 

낯선 괴물이 숨어 산다

· 모든 문제 이면의 핵심, ‘죄’의 해부학 ·

 

1. 죄는 맹수다

: 삶을 집어삼키는 치명적인 위력

 

2. 죄는 자기기만이다

: 초라한 실존을 가리려는 자아의 몸부림

 

3. 죄는 누룩이다

: 인생의 단맛을 앗아 가는 강력한 침투

 

4. 죄는 불신이다

: 하나님 아닌 곳에 뿌리를 내린 덧없는 의존

 

5. 죄는 자기 의다

: ‘선’의 얼굴로 위장한 뒤틀린 열심

 

6. 죄는 나병이다 Ⅰ

: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고집스러운 자만심

 

7. 죄는 나병이다 Ⅱ

: 세속의 방식으로 근본적 답을 찾는 미련한 갈구 

 

8. 죄는 예속이다

: 자발적으로 자유를 마다하는 탐욕의 악순환

 

Part 2

답 없는 죄인들의 골짜기에 빛이 임하다

· 죄의 독성을 무력화하는 ‘복음’의 해독제 ·

 

9. 죽음을 통과해 부활에 이르는 참된 회개의 기적

 

10. 다시 하나님과의 가슴 뛰는 친밀함 속으로

 

 

본문 펼쳐보기

 

<8-9쪽 중에서>

사람들은 ‘죄’(sin)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은 예배가 끝난 뒤 옷을 잘 차려입은 한 여성이 팀에게 다가와 노기를 띠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아마 예배 순서 중 ‘죄의 고백’ 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내 아이들도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할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러더니 홱 돌아서서 그길로 예배당을 나가 버렸다. 어느 날은 새로 회심한 한 여성이 몇몇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 팀을 초대했다. 화기애애하던 대화는 그중 한 여성이 굳은 시선으로 팀을 쏘아보며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목사님은 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렇죠?” 팀은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려 애썼다. 우리는 다 죄인이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본연의 모습에 미치지 못하며, 모두가 망가진 존재이기에 누구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녀에게 ‘죄’란 살인범, 강간범, 나치당원, KKK(백인 우월주의 비밀결사단체) 단원 같은 ‘세상의 쓰레기들’에게나 해당하는 핵폭탄급 단어였다. 팀이 어떤 설명을 해도 그녀의 생각을 돌릴 수는 없었다.

죄에는 여러 차원이 있으며,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그 죄에 물들어 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는 웬만한 사람에게 익숙한 개념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듣고 나서 대개 거기에 저항한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주의 진정한 왕께 반역하고, 그분의 사랑을 뿌리치며 그분의 마음을 짓밟았다는 개념은…… 선과 악, 옳고 그름, 포용과 배제를 가르는 세상의 방식에는 도저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28-29쪽 중에서>

몇 년 전, 아들과 함께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를 보았다. 미래의 사이보그가 시간여행을 통해 현재로 와 주인공 사라 코너를 암살하려 하는 내용의 SF 영화로, 폭력적이긴 하지만 만듦새가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니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라가 처한 곤경의 상당 부분은 그녀를 뒤쫓는 킬러의 포식자적인 위력을 사람들이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등장하는 인물마다 터미네이터의 가공할 만한 힘을 제대로 모른다. 그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 불멸에 가까운 기계다. 영화 초반에 술집에 있던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경찰서에 신고하자 형사는 “거기는 공공장소니까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안전할 겁니다”라고 말한다. 공공장소라서 목격자가 많으니 아무도 감히 그녀를 죽이려 들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주위에 누가 있든 표적을 죽일 수만 있다면 이 ‘맹수’가 못할 일이란 없음을 형사는 모른다.

얼마 후 사라를 경찰서로 데려온 형사는 “저쪽 방에 소파가 있으니 거기 누워 눈 좀 붙여요. …… 이 건물에 경찰만 30명이니 여기보다 안전한 데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혼자서 그들 전부를 해치우고도 남는 터미네이터의 압도적인 실체를 그들은 꿈에도 모른다. 실제로 그들은 터미네이터에게 전멸되고 만다. 문제는 사라를 죽이려는 자가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를 죽이려는 자의 위력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 장에서 다룰 창세기 4장 3-15절 본문에서 하나님은 친히 가인에게 그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의 위력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성경 전체에 밝히 드러나 있듯이 세상이 지금처럼 망가진 주원인은 인간의 죄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죄의 위력을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때로 그럴 마음조차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한다.

 

<40쪽 중에서>

당신이 죄를 짓고 나면 죄가 당신을 짓는다. 당신이 하나의 죄를 끝냈다 해도 죄는 아직 당신을 끝내지 않았다. 당신이 짓는 죄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살아서 당신을 삼키려 한다. 죄에 그런 위력과 독기가 있다. 죄의 임무는 당신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다. 

 

<69-70쪽 중에서>

사울은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했다고 말하지만 사무엘의 직언을 통해 그의 본색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은혜로 이미 사울을 높여 주셨고 앞으로 더 높여 주실 텐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작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높아지려 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세상에서 얻으려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진실만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다. 우리는 죄인이다. 자신이 작고 하찮은 존재임을 마음 깊이 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가 자신을 속이는 근본적 이유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 자신이 작고 부족하며 흠 많은 죄인이라는 진실을 숨긴다. 진실이 하나라도 등장해 우리 죄를 들추어내면 도저히 그것을 소화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높아지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느껴진다.

 

<100-101쪽 중에서>

죄란 우리의 뿌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내리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죄를 단순히 규율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죄를 그런 식으로만 정의하면, ‘죄’와 ‘경건’을 동일한 스펙트럼 위에 놓인 ‘정도의 차이’로 보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관점대로라면 하나님의 법을 50회 위반한 사람은 죄인이지만, 3회만 위반하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5회 위반한 사람은 그 중간쯤 될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죄를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절반쯤 선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와 경건은 마음의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이고 뿌리의 위치가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다.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거나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뿌리를 내리거나.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나머지가 결정된다.

 

<109쪽 중에서>

사막에 쏟아지는 폭우는 금세 지나간다. 뿌리를 강변에 내리지 않으면 당신의 타는 듯한 갈증은 여전하다. 사막에서는 어쩌다 내리는 비가 오히려 당신에게는 최악의 경험이 될 수 있다. 그 비가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도 ‘견딜 수 없어 울부짖을 것’이다. 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사람은 가뭄의 시기도 견뎌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설령 나쁜 일이 닥치더라도 그들의 태도는 확고하다. “실망스러울 순 있지만, 이것들이 내게 꼭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야. 내가 진짜로 원하는 분은 하나님뿐이야.” 그리하여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이 모든 상황을 통과한다.

 

<126-127쪽 중에서>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감정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오늘날 대다수 신자의 감정과 같다. “날마다 악해지는 이 도시를 떠나야겠어. 이곳은 점점 더 포악해지고 하나님과 멀어질 뿐이야. 난 여기서 벗어날 거야.” 현대 도시 생활의 폐단과 위험을 생각하면 이러한 판단이 자못 논리적인 반응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세계 선교의 관점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논리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소식을 최대한 멀리까지 전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도시가 악해질수록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도시를 생각하는 당신의 논리와 그 도시를 대하는 당신의 마음은 요나와 하나님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본문에서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듯이, 절실하게 하나님을 만나야 할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를 목도하면서도 그들을 향해 아무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길 잃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도 넘쳐흘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137-138쪽 중에서>

우리는 대개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가? 왜 비판받으면 잔뜩 낙심하는가? 비판이 우리의 자아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자아상에 기초해 의를 쌓아 올리는데, 비판이 자아상이라는 그 토대를 흔들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비판할 때 상대가 공격받는다고 느낀다면, 이 또한 우리의 자기 의 때문일 수 있다. 우월감에 젖은 사람은 결코 겸손하게 상대를 바로잡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비판하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자기 의의 산물일 수 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옳지 않다는 신경질적인 고집이 우리의 동기일 수 있다.

 

<155쪽 중에서>

복음은 일단 자아상을 무너뜨린다. 복음이 결국 우리에게 주는 자아관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자의식보다도 훨씬 위대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단어를 자아상(self-image)에서 자아관(self-view)으로 바꾼 데 주목하라. 자아상은 거의 언제나 우리가 지어내 품는 것이지만, 복음이 보여 주는 우리의 참자아는 복음 없이는 가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존재다. 복음이 행하는 껄끄러운 작업을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궁전을 새로 지으려면 먼저 현장에 있던 기존 잔해부터 말끔히 치워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 고통이 따를 수 있다. 복음은 우리의 교만을 철저히 무너뜨리기에 복음의 요구에 응하려면 모멸감이 들 수밖에 없다. 복음의 겉을 한 입 베어 물면 쓰지만 속은 한없이 달다.

 

팀 켈러

timothykeller.com

gospelinlife.com

 

맨해튼을 비롯해 미국 뉴욕 여러 지역에서 예배드리는 리디머장로교회의 설립 목사. 팀 켈러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 복음 중심이며,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지성으로 성경과 이 시대를 통찰력 있게 읽어 준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구도자와 회의론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뉴스위크〉에서 “21세기의 C. S. 루이스”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변증가로도 영향력 있는 행보를 보였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버크넬대학교, 고든콘웰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대학시절 IVF 활동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고, 신학교를 갓 졸업한 스물네 살의 나이에 버지니아 웨스트호프웰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84년부터는 5년간 모교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강단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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